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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35. <부정공>만락정중수기(晩樂亭重修記)휘유원(諱維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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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부정공>동천공휘유검정려기(東川公諱有儉旌閭記)
東川公諱有儉旌閭記 孝子爲夫烈婦爲妻同日 命旌者即故東川趙氏公及夫人聞慶宋氏是己第言其孝則清贏多疾而親側無倦色定省灑掃寒署闕父母未嘗知有疾親瘠衣不解帶藥餌粥飲不委家人甞糞血指糜誠不殫遭憂水漿不入口號泣不絶聲傍人皆慮其不勝喪而不以疾自懈初終葬祭情文兩摯以至運柩築土役夫皆備新潔衣以盡其心値歲飢悉斥家什朝夕祭奠無闕儀墓日省廟晨謁以終身而痼崇己潜滋於過哀得年僅三十三而終鄉里傳謂殉考以言其烈則德配君子事舅姑誠敬公之歿縊於屏處林木家人慮其死己跟伺俄忽頓絶針藥獲甦齎毒見覺亦數度血指作書納之殯所家人信其無生晝也以伺以及於葬之日乃翻然曰姑差誰養夫嗣誰繼寧違己志而伸亡夫之心養姑終天年得從侄佾爲夫嗣而猶不以滋味輕煖近身焉老姑或以乾肉强之姑嚼之以順其志出而哇之以安自心及姑終葬祭以誠信曰無忘亡夫心也後所後遘疾殆不起夫人祝天願代露立六晝夜危疾得愈而夫人果以疾終鄉里以爲至誠所感也嗚呼之孝之烈以公質之夫人以夫人質之公宜無異辭無愧於齊軆信於幽也民到于今稱之無間言信於明也幽明之信如此聽卑之天成命之耑降也宜哉棹楔在 景宗癸卯今爲七百十年其徵信於後世宜不與今日繁夥者混也公諱有儉趙氏玉川著姓忠獻公諱元吉麗季有定策勳副正諱瑜孝旌行誼建祠二樂亭諱大成有隱德肯式南士寔公高祖考諱時休有才德而不壽公才識通曉文辭驚人將大有成立而不幸早世但以一孝成名惜乎宋氏父諱暹也繼子佾亦克考行義文章爲世宗仰不愧爲孝子烈婦之嗣云七世孫相燮將重修之以記事之文徵於友生奇宇萬宇萬甞訪相燮於曳山得過其閭而式之以有曠感也不敢辭 幸州 奇宇萬 謹識 동천공휘유검정려기(東川公諱有儉旌閭記) 효자 지아비와 열부 처가 같은 날에 포양하여 정문(旌門)을 명한 자는 곧 고동천 조공(東川趙公)과 그 부인 문경(聞慶宋氏)뿐이다. 또 그 효도를 말하면 파리하고 병이 많은 몸으로 어버이 곁에 모시어 고달픈 기색이 없이 차고 더운 때를 불관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과 쇄소응대(灑掃應對)를 게을리 아니하니 부모가 질병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부모가 병환이 나시면 약과 미음을 몸소 공대(供對)하고 상분혈지(甞糞血指)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고 상사(喪事)를 당하여는 물과 장을 먹지 아니하며 곡성(哭聲)이 끊이지 아니하니 좌우에 있는 사람이 효도 때문에 효를 상할까 염려하되 병이라 하여 조금도 고달픈 빛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초종장제(初終葬祭)에 정문(情文)을 구비하고 운상(運喪)하고 성분(成墳)한 역부(役夫)까지 다 새 옷을 깨끗이 하여 어느 하나 소홀히 않고 정성을 다하였다. 흉년을 당해 가산을 다 팔아 조석 제전을 빠뜨리지 아니하고 날마다 묘소를 살피고 새벽마다 사당에 참알(參謁)하였는데 너무 슬퍼한 때문에 고질이 생겨 겨우 三十三세로써 졸하니 향방(鄉坊)이 효로써 죽었다 전하였다. 이어서 그 부인의 열행(烈行)을 말하면 덕은 군자를 짝하였고 정성과 공경으로 시부모를 섬기며 공이 별세하매 후원 나무에 목을 메었다. 가인(家人)이 죽을까 염려하여 뒤를 살폈으나 이처럼 갑자기 목숨을 끊으려 하여 약과 침으로 치료하여 회생케 하였다. 그러나 후에도 여러 번 독약으로 자살하려 하는 것이 발견되곤 하였다. 손가락 피로 글을 써 빈소에 바치니 가인(家人)이 하종(下從)할까 두려워 주야로 사찰하였다. 이윽고 장사날을 당하여 비로소 마음을 고쳐먹고 말하되 『늙은 시어머니를 누가 봉양하며 지아비 뒤를 누가 이을 것인가. 차라리 내 뜻을 굽혀 망부(亡夫)의 마음을 따르리라.』 하고는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그 시어머니의 천년(天年)을 마치게 했다. 종질 일(佾)로 하여금 지아비의 후사(後嗣)를 정하고 오히려 맛있는 음식과 비단옷을 가까이 아니하고 늙은 시어머니가 혹 말린 육포를 먹으라고 억지로 권하면 짐짓 씹어서 그 뜻을 순종하고 나가서 토하여 스스로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시어머니가 별세하매 장사와 제사를 성신(誠信)으로써 하며 망부의 마음을 잊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후사가 병을 얻어 자못 일어나지 못하니 부인이 六일 밤낮을 밖에 서서 대신 죽기를 하늘에 축원하더니 후사의 모진 병이 쾌유하고 대신 부인이 병이 나서 별세하였다. 이에 향방이 모두 이르되 지성이 감동한 바라 하였다. 이 효(孝)와 열행(烈行)은 공(公)으로써 부인(婦人)을 이루고 부인으로써 공을 이뤘으니 동심일체(同心一体)에 부족함이 없으며 참으로 그윽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지금까지 향민(鄉民)이 이를 칭송하니 이처럼 훌륭함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윽하고 밝은 것이 참으로 이와 같으므로 사실을 조정에서 듣고 영을 내려 정문을 세우게 하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정려문은 경종(景宗) 계묘(一七二三)년에 하명한 것이며 후세에 증신한 것이 금일 지나친 포양과 혼동할 바 아니로다. 공의 휘는 유검(有儉)이요, 옥천인으로 이요정(二樂亭) 휘 대성(大成)이 고조이며 고(考)의 휘는 시휴(時休)인데 재덕(才德)이 있었으나 일찍 별세하였다. 공은 자질(姿質)과 학식이 고명하고 문사도 다른 사람을 압도하므로 장차 크게 성립할 것만 같았는데 불행히 일찍 별세하고 다만 효행으로써 이름을 이루었으니 애석하다. 송 씨(宋氏) 부 휘는 섬(暹)이요, 계사 일(佾)이 또한 능히 효도하여 행의와 문장이 당세에 뛰어나니 효자 열부의 후사로서 부끄럽지 않았다. 七세손 상섭(相燮)이 장차 중수코자 하여 사실을 기록할 문자를 우생(友生) 기우만(奇宇萬)에게 청하니 우만이 일찍이 상섭을 예산으로 찾아 가다가 그 정려를 지나가게 되어 그곳에서 경모(敬慕)하는 마음으로 감동을 느낀 바 있는 고로 감히 사양치 못한다. 幸州 夺宇萬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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